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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비극으로 끝난 '역사상 최장수 서울시장' 박원순의 지금까지의 행보

2011년 10월 27일, 당시 만 55세의 시민운동가이던 경남 창녕 출신 박원순의 이름 뒤에 '서울특별시장'이라는 직함이 붙었다.

당시 누구도 그가 한반도 역사를 통틀어 가장 오래 재임한 서울시장이 되리라 예측하지 못했을 테고,
그의 최장수 서울시장 임기가 극단적 비극으로 끝나리라고 생각한 이는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박 시장은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무상급식에 반대하며 시장직을 걸고
주민투표를 벌였다가 물러난 뒤 보궐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 나경원 당시 한나라당 후보를 제치고 당선됐다.

그는 1994년 참여연대 설립을 주도했으며 1995년부터 2002년까지 이 단체에서 사무처장으로 일하면서 한국 시민운동을 진화시켰다.

그 전에 박 시장은 이름을 날리는 인권변호사였다.
학생운동으로 구속돼 서울대에서 제명된 뒤 1980년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이어 1982년 사법연수원 수료와 함께 검사로 임용됐다가 1년만에 박차고 나와 '인권변호사의 전설'인 고(故)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일하면서 부천서 성고문 사건 등의 변론을 담당했다. 1990년대 중반에는 '서울대 성희롱 사건'의 변호인 중 하나로 활동했다.


오세훈 전 시장의 남은 임기 2년 8개월을 넘겨받은 박 시장은 '디테일에 능하다'는 평처럼
세세한 부분까지 사안을 꼼꼼하게 챙겼고, 시민사회단체 출신 인물들을 대거 서울시로 데려와 시정 곳곳에 배치했다.


특히 2015년 메르스 사태 당시 전격적으로 투명한 정보공개를 단행하는 등 결단력을 과시하며
쾌도난마의 행보를 보여 한동안 여러 여론조사에서 대권 주자 선호도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박 시장은 "조선 시대 서울시장 격인 한성판윤부터 따져도 저보다 서울시장을 오래 한 사람은 없다",
"요즘 초등학생들은 박원순 직업이 '서울시장'인 줄 안다" 등 사실에 부합하는 농담을 즐겼다.




하지만 다음날인 9일 오전 박 시장은 이미 공지했던 일정까지 모두 취소하고 잠적했으며,
오후에 딸의 실종 신고를 받고 북악산 일대 수색에 나선 경찰에 의해 10일 0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숨진 채 발견됐다.
박 시장은 최근 전직 비서로부터 성추행 혐의로 고소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박원순 서울특별시장의 임기는 3천180일에서 멈춰섰다.